교육

#1
교욱의 존재이유는 성장.
과거에는 성장을 위한 교육이 삶의 곳곳에서 이뤄졌지만, 이 시대에 성장을 독점한 곳은 학교.

상실과 자기세계의 붕괴 없이는 성장도 없다.

#2
그러나 학교는 성장의 핵심이 무엇인지, 교육은 그것을 어떻게 경험케 할 수 있는지에 대해 관심이 없다.
한국의 교육은 학생들의 성장을 위함이 아닌, 대학입학을 위한 도구적 공간일 뿐.

-학교는 아이들의 말을 듣지도/믿지도 않으며
-학교에서의 폭력과 억압은 너무나 일상적이며
-교사의 의견은 그 외의 관계에서도 진리와 기준으로 여겨졌으며
-결정적 순간에 무책임으로 반응하는 곳이며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기 보다 나를 평가하는 사람의 눈치를 보는 것이 더욱 중요하게끔 하며
-심지어 '열린교육'이라는 이름으로 무조건 말해야할 강요가 이뤄지며
-공부를 잘하는가에 따라, 집이 잘 사는가에 따라, 힘이 센가에 따라 촘촘하게 위계화되어있고, 그에 따라 폭력마저도 정당화 되는(계급적 폭력) 정글이다.

#3
폭력적이지 않은 교육이 가능한가

영화 속 P짱은,
-일방적인 관계
-스스로 삶을 선택할 수 없는 존재
-생명의 위계화
-분류, 배치되는 방식에 따라 가변적 위치를 갖는
안타까운 돼지다.

그리고 이것은 '생명'을 가르치려는 '교육'의 이름으로 일어났다. 우리가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생명을 다루는 방식은 두려움이 아니라 잔인함인 것이다.

학교라는 공간에서 이뤄지는 교육-이 사회가 요구하는 몸과 마음을 만들어내는 훈육-이 과연 강요와 폭력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 함께 생각해보고 싶은 질문들

1. '자기세계의 붕괴'를 통해 '성장'한다고 하였는데, 죠이공동체를 통하여 이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가?

2. '교육이 존재하는 이유는 성장 때문이라'는 저자의 말에 동의하는가? 동의하지 않는다면 교육의 존재이유, 목적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3. 책에 나오는 부모와 선생님의 모습에서 우리의 모습은 혹시 없는가? 생명으로 보기보다 통제하고 일방적으로 이끌어야할 대상, 혹은 나의 목적을 위해 강요해야할 대상으로 여기고 있지는 않았는가? 혹은 나의 의견이나 결정이 그들에게 진리와 기준으로 여겨지길 바라지는 않았는가?

4. 우리가 속한 공동체 내에도 권력관계가 존재하는가? 우리는 그것에 어떻게 반응할 수 있을까?

5. '교육', 나아가 '사랑'마저도 강요이자 폭력이라는 저자의 이야기에 동의하는가? 올바른 사랑, 올바른 교육은 어떻게 이뤄질 수 있을지 이야기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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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혹은 민주주의

#독서하다(일반) 2014. 3. 25. 01:14
#1
지금의 대학생들에 대한 기성세대의 비판
"청춘을 민주주의를 위해 바쳤던 우리와 달리, 너희는 탈정치화 되었다."
"너희는 우리가 지켜낸 민주주의라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모르고 있다."

집단행동을 통해 현실을 바꾸려 하기는커녕 혼자서만 잘 살아보겠다는 이들의 몸부림을 비겁하고 초라하다는 눈으로 응시.

그러나,
이들은 민주주의가 중요하다는 것을 잘 안다.
또한 민주주의를 언어화함으로써 자신들이 정치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다는 사실도 안다.

이들이 민주주의를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는 진단은
틀렸다.

#2
이들은,
'바꿔봤자'임을 안다. 이는 역사에서 검증된 사실.

민주주의와 혁명은 아이러니한 정치적 서사. 민주주의는 민중이 주인이라며 민중의 '가치'를 한껏 추켜세우지만 사실은 민중을 '선동'하는 언어에 불과.
이미 쇼는 정치, 정치는 쇼.

#3
정치의 본질에 대한 불신과 냉소
_이들은 정치가 우리 삶을 구원하지 못한다는 걸 너무 잘 알고 있다. 그래서 희망을 약속하는 그 모든 정치적 언어를 불신한다.

1) 아직은 가치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은, 다만 가치가 배반당한 현실에 던지는 냉소주의
"그럼에도 불구하고/그렇기 때문에"
: 지젝_ 모두가 모든 것의 본질을 알아버렸다고 생각하는 시대에 이데올로기는 더 이상 '앎'의 영역에서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실천'의 영역에서 작동한다. >>사람들이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고 있는가가 아니라, 그래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에 초점 맞춰야.

2) 믿음이 없는 냉소주의
"그래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 정치의 속성(사기)을 너무 잘 알아서 정치에 무감각해져버렸고 정치가 주창하는 모든 가치에 냉소적이 되어, 본질을 알기 때문에 자세한 것들을 알아볼 필요도 없다는 태도.

기성세대는 '그러면'의 막연한 희망의 언어가 아닌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실천의 언어를 이야기했어야 했다.

#4
then, 이들은 언제 정치적으로 움직이는가?
-정치가 오락이 되거나
-정치가 오락을 방해할 때

냉소에 맞서는 것은 진정성이 아니라 재미, 오락.
이들은 시민이 아닌 게이머로서 정치에 참여.
민주주의가 우리를 구원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알면서도' 그 자체가 오락이 될 때 움직인다.

그런데도 정치에 참여하라고 독려하는 우리의 언어는 '도덕적' /'그래서'

우리는 민주주의를 지나치게 절대적 가치로 고정해놓고 도덕적으로 사용하다가 정치가 도덕이 되어 버리는 바람에 '도덕'을 전면에 내세운 보수주의자들에게 역습을 당한 것이다.

대학생들의 탈정치화가 아니라
우리가 일조한 정치의 도덕화가 문제이다.

함께 생각해보고 싶은 질문

1. 우리는 학생들에게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말하고 있는가 '그래서 아무것도 하지마라'를 말하고 있는가.

2. 우리는 학생들의 '앎'에 집중하는가 '실천'에 집중하는가.

3. <복음주의 '학생'운동>을 주창하는 우리 간사들은 실제로 그들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4. 우리는 '복음'을 지나치게 절대적 가치로 고정해놓고 사용하다가 도리어 '복음'을 정죄의 도구로 사용하는 자들에게 역습을 당하지는 않고 있나.

5. 복음(목적)을 위하여, 복음적이지 않은 과정이 정당화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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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기술 <사랑의 기본요소_ 배려,책임,존경,지식>

배려

: 사랑이란,

우리가 사랑하는 것의 생명과 성장에 대한

능동적인 관심 을 말한다.

능동적인 관심이 결여된 곳에는

사랑이 있을 수 없다.

 

 

책임

: 사랑과 노동은 불가분의 것이다.

사람들은 그가 노력을 기울인 것을 사랑하며,

또 그가 사랑하는 것을 위하여 노력을 기울인다.

 

오늘날의 책임은 흔히 외부로부터 그에게 부과된 어떤 일을 가리키지만,

참된 의미로서의 책임은 완전히 자발적인 행동이다.

그것은 표현되었거나 표현되지 않은,

타인의 요구에 대한 나의 반응인 것이다.

책임이 있다는 것은

반응할 능력이 있다거나 준비가 되어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요나는 니느웨의 백성들에게 책임을 느끼지 않았다.

그는 가인과 마찬가지로 '내가 내 동생의 보호자입니까?'라고 물을 수 있었다. 

 

 

존경

: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보고,

그의 독특한 개성을 느낄 줄 아는 능력.

 

타인이 있는 그대로 성장하고 발전해야 한다는 관심을 뜻한다.

그러므로 존경은 착취의 부재를 의미한다.

만일 존경이 없다면,

책임은 지배나 소유욕으로 쉽게 타락할 것이다.

 

 

지식

: 이것은 나 자신을 위한 관심을 초월하여

다른 사람을 그 자신의 가치로서 볼수 있을 때 가능하다.

 

...인간의...그 신비를 알고자 하는 한 가지 극단적인 방법이 있는데,

그것은 타인을 완전하게 지배하는 힘이다.

...알고자 하는 이러한 시도의 궁극적인 단계는 극단적인 사디즘이며,

인간을 괴롭히는 욕구이며 능력이다.

 

..인간의 비밀 속으로 파고들어가고자하는 갈망, 그 속에는 

깊고 강렬한 인간의 잔인성과 파괴성의 본질적인 동기가 있는 것이다.

 

...아이들이 대상에 대한 신비를 알고자 그것들을 조각조각 찢어놓지만,

...행한 모든 것은 그것을 파괴시킨 것뿐이다...

 

완전한 지식에 도달하는 단 하나의 유일한 방법은

사랑의 행위이다.

왜냐하면 이 행위는

사고를 초월하고, 말을 초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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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기술 <[공생적 결합] vs. [성숙한 사랑]>

[공생적 결합]

 

공생적 결합의 수동태_ 마조히즘

: 자신의 통합성을 포기하고,

자신을 다른 사람이나

외부의 어떤 도구로 만드는 것.

 

공생적 결합의 능동태_ 사디즘

: 자기를 숭배하는 사람을 끌어들임으로써

자신의 영향력을 넓히고 강화시키는 것.

 

이 둘은,

표현상으론 차이가 있는 것 같으나,

정서적 의미에서는 '통합성이 없는 융합'이란 점에서 동일하다.

 

 

[성숙한 사랑]

 

그의 통합성과 개성을 유지하는 조건 하에서 이루어지는 결합.

 

능동적 힘,

그를 동료들로부터 분리시키는 장벽을 파괴시키는 힘,

그를 다른 이들과 결합시키는 힘.

 

"자기 자신을 줄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은 누구나 부유한 사람이다."

그는 타인에게 그의 기쁨을,

그의 흥미를,

그의 이해를,

그의 지식을,

그의 유머를,

그의 슬픔을,

즉 그의 마음 속에 살아있는 모든 것들을 주는 것이다.

 

이와 같이 그의 생명을 줌으로써

그는 다른 사람을 풍족하게 하며,

또한 자기자신의 생명감을 고양시킴으로써

타인의 생명감을 고양시킨다.

 

...'준다'는 것은

어떤 사람을 주는 사람으로 만드는 것을 의미하며,

그들 두 사람이 생에 대하여 감사하게 하는 것이다.

 

...만약 당신이

사랑을 불러일으키지 못한 채 사랑을 한다면,

즉 당신의 사랑이 사랑을 만들어내지 못한다면,

또 사랑하는 사람으로써 삶의 표현으로 당신이 자신을 사랑받는 사람으로 만들지 못한다면,

결국 당신의 사랑은 무능하고 불행한 것이 될 것이다.

 

...준다는 것 이외에도 사랑의 능동적인 성격은

그것이 항상 사랑의 모든 형태에 공통되어 있는

어떤 기본적인 요소들을 의미하는데, 그것들은

'배려, 책임, 존경, 지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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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기술 <인간의 가장 절실한 욕구_ 분리상태를 극복하는 것>

(아담과 하와)

사랑으로 인한 재결함 없이

인간이 서로 분리되어 있다는 것을 인지하는 것은

수치심의 근원이 된다.

그것은 동시에

죄책감과 불안의 근원이 되기도 한다.

 

인간의 가장 절실한 욕구

자신의 분리상태를 극복하여

고독이라는 감옥으로부터 해방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것이 실패했을때, 정신이상이 온다.

 

...

그러나 현대사회의 '동조에 의한 결합'은 허위의 결합일 뿐,

완전한 해답은 사랑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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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기술 <사랑은 기술이다.>

사랑은 일종의 놀이의 감정인가?

그렇다면 사랑에 대해 배울 필요가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랑을 능력의 문제로 간주하기보단

사랑받는 문제로 여기고 있다.

그런 사람들에겐 어떻게 사랑을 받을 수 있는가,

어떻게 사랑스럽게 되는가가 중요한 문제가 된다.

이를 위해 사람들은 스스로를 매력적으로 만들려 한다.

(성공, 돈, 몸매, 치장, 친절, 호감 등등)

 

이들은 또 사랑의 문제를 '능력'의 문제가 아닌

'대상'의 문제로 가정한다.

사람들은 '사랑한다는 것'은 쉬우나,

'사랑할 만한' 적당한 대상을 발견하는 것은 어렵다고 생각한다.

 

이들은 또한 '사랑에 빠지게 되는' 최초의 경험을,

'사랑에 머물러 있는 상태'와 혼돈하고 있다.

 

...

 

그러나,

 

사랑은

일종의 기술이다.

그렇다면 지식과 노력이 필요하다.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를 배워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세 가지가 필요하다. 

1) 그 이론을 완벽하게 아는 것

2) 능숙하게 실천하는 것

3) 이 기술의 숙달에 관심을 두는 것. 이보다 더 중요한 건 없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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