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기 2장

#성경공부하다/사사기 2014. 11. 9. 01:16

[1] 본문내용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기


1. 여호와의 사자가 이스라엘 자손이 이 땅의 주민을 쫓아내지 않은 것으로 인해 말씀하시니 백성이 울었다. 

1) 여호와의 사자가 길갈에서부터 보김으로 올라와 말하였다. 

- 내가 너희를 애굽에서 올라오게 하여 내가 너희의 조상들에게 맹세한 땅으로 들어가게 하였다. 

- 또 내가 너희와 함께 한 언약을 영원히 어기지 아니하리니 이 땅의 주민과 언약을 맺지 말며 그들의 제단들을 헐라 하였다. 

- 그랬음에도 너희가 내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였으니 어찌하여 그리하였느냐.

- 그러므로 내가 그들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지 아니하리니 그들이 너희 옆구리에 가시가 될 것이며 그들의 신들이 너희에게 올무가 될 것이다. 

2) 여호와의 사자가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 이 말씀을 이르매 백성이 소리를 높여 울었다. 


2. 여호수아와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행하신 모든 일을 본 자들이 사는 동안에는 백성이 여호와를 섬겼으나, 그 세대가 죽고 난 다음 세대는 여호와와 그의 행하신 일을 알지 못했다. 

1) 전에 여호수아가 백성을 보내매 이스라엘 자손이 각기 그들의 기업으로 가서 땅을 차지하였다.

2) 또 백성이 여호수아가 사는 날 동안과 여호수아 뒤에 생존한 장로들 곧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모든 큰 일을 본 자들이 사는 날 동안에 여호와를 섬겼다. 

3) 그러나 여호와의 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110세에 죽으매 무리가 그의 기업 경내 에브라임 산지 가아스 산 북쪽 딤낫 헤레스에 그를 장사하였고, 그 세대의 사람도 다 그 조상들에게 돌아갔다.

4) 그리고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했다. 


3. 이스라엘이 여호와를 버리고 주위의 다른 신들을 섬겨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여 그들이 대적에게 괴로움을 당하게 하셨다.

1)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했다.

- 바알들을 섬기며

- 애굽 땅에서 그들을 인도하여 내신 그들의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 

- 다른 신들 곧 그들의 주위에 있는 백성의 신들을 따라 그들에게 절하여 여호와를 진노하시게 하였다.

- 곧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고 

-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겼다.

2) 이에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셨다.

- 이스라엘을 노략하는 자의 손에 넘겨주사 그들이 노략을 당하게 하시고

- 주위에 있는 모든 대적의 손에 팔아 넘기시니 그들을 당하지 못하였고

- 그들이 어디로 가든지 여호와의 손이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셨다. 

3) 이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맹세하신 것과 같아서 그들의 괴로움이 심하였다.


4. 그들을 구원하려 여호와께서 사사들을 세우셨으나 그들이 도리어 조상의 길을 떠나 여호와 앞에 음행하였다.

1) 여호와께서 사사들을 세우사 노략자의 손에서 그들을 구원하게 하셨다.

2) 그러나 그들이 그 사사들에게도 순종하지 않았다.

3) 오히려 다른 신들을 따라가 음행하며 그들에게 절하고 여호와의 명령을 순종하던 조상들이 행하던 길에서 속히 치우쳐 떠나서 그와같이 행하지 않았다.


 5. 백성이 노략을 당하니 괴로워서 슬피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뜻을 돌이키사 사사를 보내주셨음에도 그들이 여호와 앞에 패역한 길을 멈추지 않았다. 

1)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해 사사들을 세우실 때에는 그 사사와 함께 하셨고, 그 사사가 사는 동안에 여호와께서 그들을 대적의 손에서 구원하셨다. 

2) 이는 그들이 대적에게 압박과 괴롭힘을 받아 슬피 부르짖으므로 여호와께서 뜻을 돌이키신 것이었다.

3) 그럼에도 그 사사가 죽은 후에는 그들이 돌이켜 그들의 조상들보다 더욱 타락하였다.

- 다른 신들을 따라 섬기며

- 그들에게 절하고 

- 그들의 행위와 패역한 길을 그치지 않았다.

4) 이에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여 이르시되

- 이 백성이 내가 그들의 조상들에게 명령한 언약을 어기고

- 나의 목소리를 순종하지 아니하였으니

- 나도 여호수아가 죽을 때에 남겨 둔 이방 민족들을 다시는 그들 앞에서 하나도 쫓아내지 않을거다. 

- 이는 이스라엘이 그들의 조상들이 지킨 것 같이 나 여호와의 도를 지켜 행하나 아니하나 그들을 시험하려 함이라.

5) 여호와께서 그 이방 민족들을 머물러 두사 그들을 속히 쫓아내지 않으셨으며 여호수아의 손에 넘겨 주지 아니하셨다. 




[2] 정리하면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메시지와 묵상들 


1. 역사의 중요성. 

역사는, 그것이 온전히 잘 기억되고, 전승되고, 그것으로 지금을 살게 할 때에 의미가 있다. 끊기고 잊혀진 역사는, 그 자체만으로는 아무 힘도 없는 것같다. 

이스라엘 백성의 조상들이 이전에 하나님의 크신 능력과 행하심을 직접 눈으로 보고 경험했음에도, 그 이후의 세대들이 그것을 알지 못하니 온전한 신앙을 버리게 되는 것이 참 슬픈 일인 것 같다. 하나님의 행하심을 직접 경험한 자라면, 그것이 내 다음 세대에도 생생히 기억될 수 있게 전해주는 것이 책임일 것이며, 이전의 조상들에게서 그것을 든는 자라면, 겸손히 배우는 마음으로 잘 새겨들어야 할 것이다. 


2. 그들 주위에 있는 백성의 신들을 따라 섬기다.

하나님께서 염려하셨던 것은 이것이었을 거다. 다 쫓아내지 않고 같이 살면서, 이스라엘은 분명 다른 세상의 신들을 보게 됐을 것이고, 하나님과 그들의 신들을 겸하여 섬기게 될 것을, 하나님은 아셨을 거다. 그래서 그들의 생명을 위해 명령하셨던 것인데, 그들은 그것을 어겼고, 결국 그것의 열매를 자신들이 먹게 되었다. 마치, 생각을 세우는 생각들에서 말하는 것처럼, 본래 나의 욕망이 아니던 것임에도, 주변에서 그것을 욕망하고 그것을 행하면, 자연스레 영향을 받는 것처럼, 그들은 어느순간 주변 백성들이 따르는 신들을 매력적으로 바라보게 되었을 거다. 하나님은 엄밀하게 이것을 '여호와를 버렸다'고 기록하게 하셨다. 그들의 행위가 사람을 죽이거나 도덕적으로 악해서가 아니라, 하나님 외의 다른 신을 신으로 인정하고 섬기기 시작한 것, 그들을 따르기 시작한 것 자체가, 하나님에게는 그분을 버린 것이다... ㅠㅠ 


3. 이스라엘 백성은 붕어대가리.

왜 자꾸 반복하는지 모르겠다. 하나님의 진노로 그들이 노략을 당해서, 너무 괴로우니 슬피 부르짖었댄다. 그래서 하나님이 뜻을 바꿔서 사사를 보내주셨는데, 그들은 사사들에게도 순종하지 않고, 그들이 죽으면 이전보다 더 타락했단다. 맞으면 '잘못했어요 한번만 봐주세요'하며 싹싹 빌고선, 그 현장과 상황을 모면하면 다시금 제멋대로 사는, 진짜 반성과 회개가 없는 삶이 바로 이런 삶일 것이다. 잠깐 어려움을 모면하기 위한 신앙은 참 피상적이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심 없는 연명하는 삶. 살아 있으나 풍성함을 누리지 못하는 불쌍한 삶. 나의 신앙은 괴로움을 모면하기 위한 신앙인가, 참 하나님을 따르기 위한 신앙인가. 




[3] 말씀앞에 정직한 나의 고백 & 오늘하루 삶에 책임있는 적용


1. 나는 무엇을 알고있고, 무엇을 잊고있는가.

나는 역사를 통해 무엇을 알아야 하고, 다음 세대에겐 무엇을 전해줘야 할것인가. 

내가 지금 이 시대에서, 하나님나라 백성으로 또한 대한민국 백성으로, 알고 듣고 전승해야할 것은 무엇인가.


2. 인간은 약하다. 그들에겐 이전의 조상들의 삶을 따르는 선택지와, 지금 곁에서 같이 지내는 다른 백성을 따르는 선택지, 이렇게 두가지가 있었을 것. 그러나 그들은 지금 곁에서 함께 사는 이들의 삶을 따르기로 선태한 것 같다. 인간은 정말 약한지라, 곁에서 일어나는 일들과 사람들의 이야기에 매혹되기가 쉽다. 내가 살기 위해서라도, 내 곁에 무엇을 그리고 누구를 둘 것인가는 중요한 일인 것 같다. 주를 버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삶의 환경에 다양한 장치들과 배치가 중요할 것 같다. 나에겐 어떤 배치가 유해하고, 어떤 배치가 유익한가. 물리적인 공간, 관계, 내가 주로 보고 듣는 것, 배우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주를 섬기기 위하여 내겐 어떤 변화가 필요할까.


3.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적선이 아니다. 예배해 드리는 것, 기억해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참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나의 하나님으로, 유일한 하나님으로 언약 가운데 따르는 것,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 같다. 피상적이고 수동적인 '그저 같이 삶'의 부부생활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사랑하며 함께하는 삶과 지조'를 바라시는 것이다. 인간인 나조차도 그것을 원하고 사모하는데, 하나님은 어떠시랴. 그러나 나는 하나님에 대하여 어느 편에 가까운가. 가까스로 연명인가, 풍성한 누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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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 1장

#성경공부하다/사사기 2014. 11. 2. 01:31

[1] 본문내용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기


1. 여호수아가 죽은 후, 여호와의 명을 따라 유다가 (형제 시므온과 함께)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에게 나아가 승리를 거두었다. 

1)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여쭈어 "우리 가운데 누가 먼저 올라가서 가나안 족속과 싸울까요?"

2) 여호와께서 "유다가 올라가라. 보라 내가 이 땅을 그의 손에 넘겨 주었다"하셨다.

3) 유다가 그의 형제 시므온에게 "내가 제비 뽑아 얻은 땅에 나와 함께 올라가서 가나안 족속과 싸우자. 그러면 나도 네가 제비 뽑아 얻은 땅에 함께 가리라"하니 시므온이 유다와 함께 갔다.

4) 유다가 올라가니 여호와께서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을 그들의 손에 넘겨 주셨다.

5) 그래서 그들이 베섹에서 만명을 죽이고, 아도니 베섹을 만나 그와 싸워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을 죽였다.

6) 그리고 도망가는 아도니 베섹을 쫓아가서 잡아 그의 엄지손가락과 엄지발가락을 잘랐다.

7) 이에 아도니 베섹이 이르되 "옛적에 칠십 명의 왕들이 그들의 엄지손가락과 엄지발가락이 잘리고 내 상 아래에서 먹을 것을 줍더니 하나님이 내가 행한 대로 내게 갚으심이로다"하다.

8) 무리가 그를 끌고 예루살렘에 이르렀더니 그가 거기서 죽었다.


2. 유다가 예루살렘과 헤브론, 또 곳곳에 사는 가나안 족속을 쳐서 이겼다. 

1) 유다 자손이 예루살렘을 쳐서 점령하여 칼날로 치고 그 성을 불살랐다.

2) 그 후에 유다 자손이 내려가 산지, 남방, 평지에 거주하는 가나안 족속과 싸웠다.

3) 유다가 또 가서 헤브론(본 이름은 기럇 아르바)에 거주하는 가나안 족속을 쳐서 세새, 아히만, 달매를 죽였다. 


3. 더 나아가 유다가 드빌을 칠 때 옷니엘이 그곳을 점령하여 갈렙의 딸 악사를 아내로 받다.  

1) 더 나아가 유다가 드빌(본 이름은 기럇 세벨)의 주민들을 쳤다.

2) 갈렙이 "기럇 세벨을 쳐서 그것을 점령하는 자에게는 내 딸 악사를 아내로 주리라"하니 그나스(갈렙의 아우)의 아들 옷니엘이 그것을 점령하였다.

3) 그래서 갈렙이 그의 딸 악사를 옷니엘에게 주었다.

4) 악사가 출가할 때에 아버지에게서 밭을 구하고자 하여 나귀에서 내리니 갈렙이 "무엇을 원하느냐"하니 악사가 "내게 복을 주소서. 아버지께서 나를 남방으로 보내시니 샘물도 내게 주소서"하였다.

5) 이에 갈렙이 윗샘과 아랫샘을 그에게 주었다.


4. 유다가 스밧, 가사, 아스글론, 에그론을 쳐서 점령하였고 갈렙은 헤브론을 차지하였으며 베냐민은 여부스 족을 쫓아내지 못하였다.

1) 모세의 장인은 겐 사람이었는데, 그의 자손이 유다 자손과 함께 종려나무 성읍에서 올라가서 아랏 남방의 유다 황무지에 이르러 그 백성 중에 살았다.

2) 유다가 그의 형제 시므온과 함께 가서 스밧에 사는 가나안 족속을 쳐서 그곳을 진멸하였으므로 그 성읍의 이름을 호르마(여호와께 드릴 목적으로 멸망시킴을 뜻함)라 하였다.

3) 유다가 또 가사 및 그 지역과 아스글론 및 그 지역과 에그론 및 그 지역을 점령하였다.

4) 여호와께서 유다와 함께 계셨으므로 그가 산지 주민을 쫓아내었다.

5) 그러나 골짜기의 주민들은 철 병거가 있으므로 그들을 쫓아내지 못하였다.

6) 그들이 모세의 명령대로 헤브론을 갈렙에게 주었더니 그가 거기서 아낙의 세 아들을 쫓아내었다.

7) 베냐민 자손은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여부스 족속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니 여부스 족속이 베냐민 자손과 함께 오늘까지 예루살렘에 거주하였다.


5. 여호와께서 요셉가문에도 함께 하셔서 벧엘을 치게 하셨고, 그들을 도와 놓임받은 사람은 헷 사람들의 땅에 가서 다시 루스란 이름의 성읍을 세웠다. 

1) 요셉 가문도 벧엘을 치러 올러가니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셨다.

2) 요셉 가문이 벧엘(본 이름은 루스)을 정탐하다가 성읍에서 나오던 한 사람에게 성읍의 입구를 보이면 그를 선대하리라 하니 그가 성읍의 입구를 가리켰다.

3) 이에 그들이 칼날로 그 성읍을 쳤으되 오직 그 사람과 그의 가족을 놓아 보냈다.

4) 놓임받은 그 사람이 헷 사람들의 땅에 가서 성읍을 건축하고 그 이름을 루스라 하였으니 이것이 오늘까지 그곳의 이름이 되었다. 


6. 므낫세, 에브라임, 스불론, 아셀, 납달리, 단 자손은 가나안 민족들을 쫓아내지 못하여 그들과 함께 거주하였다.

1) 므낫세가 벧스안, 다아낙, 돌, 이블르암, 므깃도와 각 땅에 딸린 마을주민들을 쫓아내지 못하매 가나안 족속이 결심하고 그 땅에 거주하였다.

2) 이스라엘이 강성한 후에도 가나안 족속에게 노역을 시켰고 다 쫓아내지 않았다. 

3) 에브라임이 게셀에 거주하는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지 못하니 가나안 족속이 게셀에서 그들 중에 거주하였다.

4) 스불론은 기드론과 나할롤 주민을 쫓아내지 못하여 가나안 족속이 그들 중에 거주하면서 노역을 했다.

5) 아셀이 악고, 시돈, 알랍, 악십, 헬바, 아빅, 르홉 주민을 쫓아내지 못하여 그들 가운데 거주하였다.

6) 납달리는 벧세메스, 벧아낫 주민을 쫓아내지 못하고 그들 가운데 거주하였으나 벧세메스와 벧아낫 주민들이 그들에게 노역을 하였다.

7) 아모리 족속이 단 자손을 산지로 몰아넣고 골짜기에 내려오지 못하게 하며, 결심하고 헤레스 산과 아얄론과 사알빔에 거주하였다가 요셉 가문의 힘이 강성하매 아모리 족속이 마침내는 노역을 하였다. 

9) 아모리 족속의 경계는 아그랍빔 비탈의 바위부터 위쪽이었다.




[2] 정리하면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메시지와 묵상들


1. 왜 어떤 지파는 승리를 거두고, 왜 어떤 지파는 끝이 뭔가 찝찝한건지 모르겠다. 음, 기록에 있어서도 어떤 지파에는 하나님이 함께하셨음이 기록되고, 그것이 기록되어 있지도 않은데다가 결과적으로 가나안 족속을 다 쫓아내지도 못한 지파들을 보면, 마치 하나님이 그들의 전투에는 별로 개입하시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왜 이렇게 기록했는지도 의아하고, 실제로 이렇게 기록한 이유가 하나님의 태도의 차이였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지파들을 차별하시는지도 궁금하다. 실제도 하나님은 지파를 차별하셨는가? 그랬다면 왜 그랬을까? 


특히 유다에 대해서는 너무 드러나게 하나님이 함께하심이 표현되는 것 같고, 요셉가문에서도 그런것 같다. 궁금한 건, 왜 또 5에선 요셉가문으로 표현했다가 6에서는 에브라임과 므넷사로 각각 기록했는지도. 으아- 의문 투성이다 ㅜ 


그리고 또, 하나님이 함께 하셨다고 기록하고 있는 4의 기록도 좀 의아하다. 

4) 여호와께서 유다와 함께 계셨으므로 그가 산지 주민을 쫓아내었다.

5) 그러나 골짜기의 주민들은 철 병거가 있으므로 그들을 쫓아내지 못하였다.

이렇게 되어있는데, 어째서 여호와께서 유다와 함께 하셔서 그들이 산지의 주민은 쫓아냈다고 하면서, 같은 유다가 골짜기의 주민들을 내쫓는데 있어서는 마치 함께하시지 않은것처럼 그들은 실패하는가. 그리고 윗 문장에서 쫓아낸 것의 근거가 하나님이 함께하셔서였다면, 어째서 그것에 대비되는 문장에서 그들을 쫓아내지 못한 것이 그들에게 철병거가 있기 때문이란 말인가. 철병거가 하나님만큼 세기라도 하단 말인가? 


의문 투성이다 진짜ㅠ 

마치 결과의 어떠함을 보고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속단할 수 없다는 메시지와 함께,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거주민들을 쫓아낼 수 있다고, 동시에 모순된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것 같단 말이다 ㅠ 


2. 지파들이 가나안 거주민들을 쫓아내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마음이 약해서였을까, 아니면 그들을 노역으로 부리기에 편했기 때문이었을까. 아.. 도대체 1장에서 무얼 말하고 싶은 건지 잘 모르겠다 ㅠㅠ 메시지라기보다는 의문만 가득한 나도 답답하다 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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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 2장  (0) 2014.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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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ST욥기강해 <1장: 의로운 욥과 하늘의 상급>

[해답? + 무고한 고난]


* 우리가 가진 기술주의적 사고방식은, 세상을 이해하고 통제할 수 있는 대상으로 봄.

so, 해답을 요구하는 질문, 해결책을 요구하는 문제, 원인과 결과의 차원에서 삶을 보곤 함. 


우리는 일반적으로.. 일련의 '문제'목록을 작성하고, 그 원인을 밝힌 후, 상황에 대한 과학적 분석에 기초한 해결책을 제시...해결책이 원칙상 틀림없이 존재한다는 가정에 근거하여 절차를 밟는다. (레슬리 뉴비긴, "1984년의 이면" 중)


그러나 인간의 삶에 해결책이 없는 문제들이 존재함을 깨달아야 함. 


* 욥의 친구들은 욥이 체험한 인간의 고통을 견뎌낼 수 없었다. 그들은 원인을 찾아야 했다. 그들은 해결책을 원했다. 해답을 찾아야 했다. 그들은 자신의 신학적인 논리에 어긋나는 사실을 대면했을 때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들은 예측할 수 없는 고난의 신비에 기꺼이 직면하기보다는, 그것을 풀어야 하는 문제로만 다루기를 고집했다. (p.17)




[욥기의 패턴]


1. 상황이 설정되고 하늘과 땅의 실재가 나란히 대치되어 있는 산문적 서언(1-2장)

2. 욥과 그의 친구들이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시도한 대화를 담은 긴 시(3장-42:6)

3. 1과 짝을 이뤄, 특별한 목적을 성취하면서 이 책을 결롡시는 산문체 후기(42:7-14)


* 저자: 알수 없으나, 분명한 것은 이야기꾼

* 기록시기: 또한 알 수 없음




[1. 하늘의 법정에서 일어난 일의 배후]


* 우리는 왜 하나님을 섬기는가?

하나님에 대한 당신의 믿음은 사단의 조롱처럼 그를 섬길 "까닭이 있기 때문"인가?

- 비본질적: 누가 종교를 다른 어떤 목적을 위해 사용하는 경우

- 본질적: 누가 자신의 신앙을 사용하기 보다는 그 종교로 살아가는(삶으로 실천하는) 경우


* 선과 악의 이원론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님. 영적 전쟁이 있으나, 그것이 동등한 세력 간의 사건이 아님을 기억해야 함. 하나님의 선하심과 갈등관계에 있는 동등하고 적대적인 악의 힘은 없음. 하나님은 언제나 주권적!!




[2. 믿음의 고난]


* 우리는 하나님의 완전한 뜻과 허용적인 뜻을구별할 필요가 있다. 타락 이편의 세상은 무너진 세상이다. 여전히 하나님의 뜻은 분명하다 하더라도 그 뜻은 타락한 세상의 필요들을 통하여 굴절된 상태로 임하고 있다. 


* 욥의 믿음은 그의 고난을 경감시켜주지 못한다. 도리어 자신이 하나님에 관해 믿어왔던 것과 지금 그의 체험이 충돌(의로운 이를 돌보시는 하나님/자신이 만난 고난)하고 있다. 

사실상 고난은 선하신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소유한 사람에게만 문제가 된다. 

- 하나님의 공의는 어디에 있는가.

- 이 모든 일이 일어나는 동안 하나님은 무얼 하고 계신가.

- 신앙이 지금 제공해줄 수 있는 위로는 무엇인가.




[3. 욥의 아내] 


* 욥의 아내는 그녀의 깊은 인간적인 감정이 최소한 하나님 앞에서 표현된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평화를 유지해야 한다"는 식의 태도보다는 선한 사람들이 화를 낼 수 있고 또 화를 낸다는 것을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건전한 태도이다.




[4. 고통을 나누는 임재] 


* 욥의 친구들이 뒤에 대부분에서는 사태를 잘못 파악했지만, 처음에는 바르게 행하였다. 그들은 욜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조용히 함께 해주었다. 그들의 침묵은 말보다 더 감동적이다. 고통을 나누는 임재는 침묵의 긍휼을 통해 이뤄지는 강력한 사역이다. 


임재(함께 있어주는 것)은 약함의 섬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은 그들의 연약한 부분에서 연약해지고, 그들이 연약해지는 입장에 처하는 것. 그것은 기꺼이 상대방이 당하는 고통을 겪는 것. 그러나 이는 고통당하는 자가 되려고 시도하는 것이 아니며, 도리어 고통당하는 이가 노출되어 있는 일이 자신을 노출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크레이그 딕스트라)




[5. 서언의 목적]


* 산문체 서언은 이 시의 드라마가 일어나고 있는 장면을 설정할 뿐 아니라 그 이상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 

1) 1-2장은 모든 고난이 반드시 죄에 기인한다는 견해를 무시한다. "고난이 형벌이라는 개념은 모든 고난의 상황을 설명하는 완전한 해답으로는 타당하지 못하다(존스)"

2) 욥이 삶의 실수를 깨우칠 수 있도록 훈련받고 있다는 생각은 잘못되었음을 보여준다. 욥에 대한 하나님의 견해는 '흠 없고 의로운 사람'이었다. 이는 욥의 인격이 그의 고난을 통해 정결해지고 있다는 생각을 배제한다.

3) 선하고 의로운 사람이 분명한 이유 없이 이 세상에서 고난을 당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4) 무고한 고난을 더 넓은 배경- 곧 하나님과의 관계라는 더 큰 구조 안에서 보게 해준다.

5) 사람이 무의식적으로라도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는 도구가 될 수 있음을 암시한다. 

 



[6. 욥의 애통]


* 그가 겪는 고통은 이제 도리어 하나님의 부재와 침묵 때문이다.욥은 자신의 체험과 신앙을 조화시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애쓰고 있다. 

우리가 하나님과 그분의 선하심에 대해서 알고 있는 바와, 하나님이 품고 있는 하늘의 목적들의 신비에 관해 알고 있는 바가(곧, 하나님에 대한 욥의 지식과 하나님의 방식에 대한 무지가) 충돌하며 참기 어려운 긴장이 존재한다. 


욥은 자기 생명이 하나님의 손에 있음을 알고 있으며, 그가 선한 분이라는 신앙 안에서 살아왔다. 그러나 최근 실제적인 삶의 체험에서 하나님이 그의 복지를 염두에 두고 계신지를 발견하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욥은 자신에게 임한 모든 압도적인 불행 중에도 여전히 하나님과 접촉하고 있음을 확신하지만, 그것은 이미 그가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하나님이 아니다. 하나님은 지금 그분의 부재의 어두움 안에서만 그 임재가 알려지는, 감추어진 하나님이다. 


그는 단 한 순간도 자기가 하나님과 관게를 맺고 있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완전히 다른 성격의 하나님을 만나게 된 사실은 그를 거의 미칠 지경으로 몰고 갔다.   (칼 바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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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 3:1-10

[1. 본문내용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기]


1. 베드로와 요한, 날때부터 못 걷는 자가 성전에서 마주치다.

1) 오후 세시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가다.

2) 그 때에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사람들이 메고 오다.

3) 이 사람은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해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2. 구걸하는 자는 구걸을 기대하나 베드로와 요한은 다른 것을 주려하다.

1) 날때부터 못 걷는 자가 베드로와 요한을 보고 구걸하다.

2) 베드로와 요한이 그를 주목하여 "우리를 보라" 하다.

3) 그는 그들로부터 무엇을 얻을까하여 바라보다.

4) 베드로가 "은과 금은 내게 없으나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며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다.


3. 베드로와 요한이 그를 일으키고 그는 걷고 뛰며 하나님을 찬송하다.

1) 그의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어 뛰어 서서 걷다.

2)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고 뛰며 하나님을 찬송하다.

3) 모든 백성이 그의 걷는 것과 하나님 찬송함을 보고 그가 본래 누구인줄을 알고는 심히 놀랍게 여기며 놀라더라.



[2. 정리한 내용 다시 풀어쓰기]


오후 세시(제 구시)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갔다. 그 때에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사람들이 메고 왔는데, 이 사람은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해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사람이었다. 


그가 마침 베드로와 요한을 보고 구걸했다. 베드로와 요한이 그를 주목하여 "우리를 보라"하니, 그는 그들로부터 무엇을 얻을까하여 바라보았다. 이에 베드로가 "은과 금은 내게 없으나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하며 오른손을 잡아 일으켰다.


그러자 그의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어 뛰어 서서 걷게 되었다. 그는 베드로와 요한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고 뛰며 하나님을 찬송했다. 모든 백성은 그가 본래 누구인줄을 알고는 그가 걷는 것과 하나님 찬송함을 보고 심히 놀랍게 여기며 놀랐다.



[3. 정리하면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메시지와 묵상들]  


1. 내게는 무엇이 있을까?

베드로는 그가 구걸을 하던 때에, 바로 "금과 은은 내게 없지만, 내게 있는 이것을 줄게-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했다. 그에게 있던 것은 나사렛 예수의 이름.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셔서 우리 죄를 대신하신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 게다가 그분은 나사렛이라는 작고 보잘것 없는 마을에서 나신 분. 그 이름은 모든 가난하고 병든 자, 아프고 주린 자에게 오셔서 그들을 치유하시고 새생명을 주시는 분. 베드로가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그 구걸하던 자를 대할 때 그의 마음이 어땠을까도 상상하게 했다. 주께서 이 사람을 대하셨다면 어떻게하셨을까를 느꼈을 것 같다. 나사렛 예수였다면 분명 사랑스런 눈으로 그를 긍휼히 여기며 후히 고쳐주셨겠지- 베드로는 이런 마음으로 그를 대하며 손을 잡아 일으키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내게는 무엇이 있는가. 내게도 나사렛 예수의 이름이 있는가, 아니면, 그저 예수의 이름이 있는가, 아니면, 그것보다 내가가진 능력, 내모습이 더 먼저 보이는가..


내가 무엇을 소유하였는가. 내가 무엇을 의지하는가.


2. 사람들은 나면서부터 못 걷게 된 사람을 메어와서 매일 성전 미문에 두었다는 것이 신기했다. 그를 매일 도와주는 수고를 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 덕분에 이 나면서부터 못 걷는 자는 구걸을 할 수 있었고, 게다가 성전 앞에서 구걸하는 것으로 먹고 살 수 있었다는 사실이, 놀랍다. 내 주변에, 내가 돕지 않으면 아무것도 해먹을 수 없는 사람이 있다면, 응당 도와야 하는 것이, 나의 몫인것 같다. 수고롭지만, 그 수고가 그를 살리는 것이기에, 매번이라도 몇년이라도 기꺼이 감당하는 것이, 돕고돕는 삶. 

좀 아름다워 보였다.


음, 그리고 정말, 불쌍한 사람을 위한 재정과 수고를 학생때처럼 좀 떼어놔야겠다. 요새는 너무 나의 여유에 집중돼있었던 것 같다 ㅠ 


3. 나음 받았을 때 그의 반응이 재밌다.

그는 바로 걷고 뛰며 드디어, 성전에 들어갔다.(궁금하다. 이전에 못 걸을 땐 성전에 들어가는 것이 금지 되었었나??) 그러면서 하나님을 찬송하였다. 음. 

내가 고침 받을 때, 막히던 것이 뚫릴 때, 나의 절망이 소망이 되고 탄식이 기쁨이 될 때, 나는 하나님을 찬송하였는가? 그랬었지만, 내가 많이 부유해진 것 같다-마음이. 하나님을 찬송할 수 밖에 없는 상황들이 있음에도, 그걸 나의 몫으로 많이 가져갔던 것 같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하나님을 찬송하는 길이다. 주를 의지하기를 아침부터 꿈꾸게 하심에 감사- 그리고 말씀으로 재초청하심에 감사- 오늘 하루, 오늘 만나는 모든 사람들과 일정들을 주님께 의지합니다. 나사렛 예수의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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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1
교욱의 존재이유는 성장.
과거에는 성장을 위한 교육이 삶의 곳곳에서 이뤄졌지만, 이 시대에 성장을 독점한 곳은 학교.

상실과 자기세계의 붕괴 없이는 성장도 없다.

#2
그러나 학교는 성장의 핵심이 무엇인지, 교육은 그것을 어떻게 경험케 할 수 있는지에 대해 관심이 없다.
한국의 교육은 학생들의 성장을 위함이 아닌, 대학입학을 위한 도구적 공간일 뿐.

-학교는 아이들의 말을 듣지도/믿지도 않으며
-학교에서의 폭력과 억압은 너무나 일상적이며
-교사의 의견은 그 외의 관계에서도 진리와 기준으로 여겨졌으며
-결정적 순간에 무책임으로 반응하는 곳이며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기 보다 나를 평가하는 사람의 눈치를 보는 것이 더욱 중요하게끔 하며
-심지어 '열린교육'이라는 이름으로 무조건 말해야할 강요가 이뤄지며
-공부를 잘하는가에 따라, 집이 잘 사는가에 따라, 힘이 센가에 따라 촘촘하게 위계화되어있고, 그에 따라 폭력마저도 정당화 되는(계급적 폭력) 정글이다.

#3
폭력적이지 않은 교육이 가능한가

영화 속 P짱은,
-일방적인 관계
-스스로 삶을 선택할 수 없는 존재
-생명의 위계화
-분류, 배치되는 방식에 따라 가변적 위치를 갖는
안타까운 돼지다.

그리고 이것은 '생명'을 가르치려는 '교육'의 이름으로 일어났다. 우리가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생명을 다루는 방식은 두려움이 아니라 잔인함인 것이다.

학교라는 공간에서 이뤄지는 교육-이 사회가 요구하는 몸과 마음을 만들어내는 훈육-이 과연 강요와 폭력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 함께 생각해보고 싶은 질문들

1. '자기세계의 붕괴'를 통해 '성장'한다고 하였는데, 죠이공동체를 통하여 이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가?

2. '교육이 존재하는 이유는 성장 때문이라'는 저자의 말에 동의하는가? 동의하지 않는다면 교육의 존재이유, 목적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3. 책에 나오는 부모와 선생님의 모습에서 우리의 모습은 혹시 없는가? 생명으로 보기보다 통제하고 일방적으로 이끌어야할 대상, 혹은 나의 목적을 위해 강요해야할 대상으로 여기고 있지는 않았는가? 혹은 나의 의견이나 결정이 그들에게 진리와 기준으로 여겨지길 바라지는 않았는가?

4. 우리가 속한 공동체 내에도 권력관계가 존재하는가? 우리는 그것에 어떻게 반응할 수 있을까?

5. '교육', 나아가 '사랑'마저도 강요이자 폭력이라는 저자의 이야기에 동의하는가? 올바른 사랑, 올바른 교육은 어떻게 이뤄질 수 있을지 이야기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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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혹은 민주주의

#독서하다(일반) 2014. 3. 25. 01:14
#1
지금의 대학생들에 대한 기성세대의 비판
"청춘을 민주주의를 위해 바쳤던 우리와 달리, 너희는 탈정치화 되었다."
"너희는 우리가 지켜낸 민주주의라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모르고 있다."

집단행동을 통해 현실을 바꾸려 하기는커녕 혼자서만 잘 살아보겠다는 이들의 몸부림을 비겁하고 초라하다는 눈으로 응시.

그러나,
이들은 민주주의가 중요하다는 것을 잘 안다.
또한 민주주의를 언어화함으로써 자신들이 정치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다는 사실도 안다.

이들이 민주주의를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는 진단은
틀렸다.

#2
이들은,
'바꿔봤자'임을 안다. 이는 역사에서 검증된 사실.

민주주의와 혁명은 아이러니한 정치적 서사. 민주주의는 민중이 주인이라며 민중의 '가치'를 한껏 추켜세우지만 사실은 민중을 '선동'하는 언어에 불과.
이미 쇼는 정치, 정치는 쇼.

#3
정치의 본질에 대한 불신과 냉소
_이들은 정치가 우리 삶을 구원하지 못한다는 걸 너무 잘 알고 있다. 그래서 희망을 약속하는 그 모든 정치적 언어를 불신한다.

1) 아직은 가치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은, 다만 가치가 배반당한 현실에 던지는 냉소주의
"그럼에도 불구하고/그렇기 때문에"
: 지젝_ 모두가 모든 것의 본질을 알아버렸다고 생각하는 시대에 이데올로기는 더 이상 '앎'의 영역에서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실천'의 영역에서 작동한다. >>사람들이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고 있는가가 아니라, 그래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에 초점 맞춰야.

2) 믿음이 없는 냉소주의
"그래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 정치의 속성(사기)을 너무 잘 알아서 정치에 무감각해져버렸고 정치가 주창하는 모든 가치에 냉소적이 되어, 본질을 알기 때문에 자세한 것들을 알아볼 필요도 없다는 태도.

기성세대는 '그러면'의 막연한 희망의 언어가 아닌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실천의 언어를 이야기했어야 했다.

#4
then, 이들은 언제 정치적으로 움직이는가?
-정치가 오락이 되거나
-정치가 오락을 방해할 때

냉소에 맞서는 것은 진정성이 아니라 재미, 오락.
이들은 시민이 아닌 게이머로서 정치에 참여.
민주주의가 우리를 구원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알면서도' 그 자체가 오락이 될 때 움직인다.

그런데도 정치에 참여하라고 독려하는 우리의 언어는 '도덕적' /'그래서'

우리는 민주주의를 지나치게 절대적 가치로 고정해놓고 도덕적으로 사용하다가 정치가 도덕이 되어 버리는 바람에 '도덕'을 전면에 내세운 보수주의자들에게 역습을 당한 것이다.

대학생들의 탈정치화가 아니라
우리가 일조한 정치의 도덕화가 문제이다.

함께 생각해보고 싶은 질문

1. 우리는 학생들에게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말하고 있는가 '그래서 아무것도 하지마라'를 말하고 있는가.

2. 우리는 학생들의 '앎'에 집중하는가 '실천'에 집중하는가.

3. <복음주의 '학생'운동>을 주창하는 우리 간사들은 실제로 그들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4. 우리는 '복음'을 지나치게 절대적 가치로 고정해놓고 사용하다가 도리어 '복음'을 정죄의 도구로 사용하는 자들에게 역습을 당하지는 않고 있나.

5. 복음(목적)을 위하여, 복음적이지 않은 과정이 정당화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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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기술 <사랑의 기본요소_ 배려,책임,존경,지식>

배려

: 사랑이란,

우리가 사랑하는 것의 생명과 성장에 대한

능동적인 관심 을 말한다.

능동적인 관심이 결여된 곳에는

사랑이 있을 수 없다.

 

 

책임

: 사랑과 노동은 불가분의 것이다.

사람들은 그가 노력을 기울인 것을 사랑하며,

또 그가 사랑하는 것을 위하여 노력을 기울인다.

 

오늘날의 책임은 흔히 외부로부터 그에게 부과된 어떤 일을 가리키지만,

참된 의미로서의 책임은 완전히 자발적인 행동이다.

그것은 표현되었거나 표현되지 않은,

타인의 요구에 대한 나의 반응인 것이다.

책임이 있다는 것은

반응할 능력이 있다거나 준비가 되어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요나는 니느웨의 백성들에게 책임을 느끼지 않았다.

그는 가인과 마찬가지로 '내가 내 동생의 보호자입니까?'라고 물을 수 있었다. 

 

 

존경

: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보고,

그의 독특한 개성을 느낄 줄 아는 능력.

 

타인이 있는 그대로 성장하고 발전해야 한다는 관심을 뜻한다.

그러므로 존경은 착취의 부재를 의미한다.

만일 존경이 없다면,

책임은 지배나 소유욕으로 쉽게 타락할 것이다.

 

 

지식

: 이것은 나 자신을 위한 관심을 초월하여

다른 사람을 그 자신의 가치로서 볼수 있을 때 가능하다.

 

...인간의...그 신비를 알고자 하는 한 가지 극단적인 방법이 있는데,

그것은 타인을 완전하게 지배하는 힘이다.

...알고자 하는 이러한 시도의 궁극적인 단계는 극단적인 사디즘이며,

인간을 괴롭히는 욕구이며 능력이다.

 

..인간의 비밀 속으로 파고들어가고자하는 갈망, 그 속에는 

깊고 강렬한 인간의 잔인성과 파괴성의 본질적인 동기가 있는 것이다.

 

...아이들이 대상에 대한 신비를 알고자 그것들을 조각조각 찢어놓지만,

...행한 모든 것은 그것을 파괴시킨 것뿐이다...

 

완전한 지식에 도달하는 단 하나의 유일한 방법은

사랑의 행위이다.

왜냐하면 이 행위는

사고를 초월하고, 말을 초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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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기술 <[공생적 결합] vs. [성숙한 사랑]>

[공생적 결합]

 

공생적 결합의 수동태_ 마조히즘

: 자신의 통합성을 포기하고,

자신을 다른 사람이나

외부의 어떤 도구로 만드는 것.

 

공생적 결합의 능동태_ 사디즘

: 자기를 숭배하는 사람을 끌어들임으로써

자신의 영향력을 넓히고 강화시키는 것.

 

이 둘은,

표현상으론 차이가 있는 것 같으나,

정서적 의미에서는 '통합성이 없는 융합'이란 점에서 동일하다.

 

 

[성숙한 사랑]

 

그의 통합성과 개성을 유지하는 조건 하에서 이루어지는 결합.

 

능동적 힘,

그를 동료들로부터 분리시키는 장벽을 파괴시키는 힘,

그를 다른 이들과 결합시키는 힘.

 

"자기 자신을 줄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은 누구나 부유한 사람이다."

그는 타인에게 그의 기쁨을,

그의 흥미를,

그의 이해를,

그의 지식을,

그의 유머를,

그의 슬픔을,

즉 그의 마음 속에 살아있는 모든 것들을 주는 것이다.

 

이와 같이 그의 생명을 줌으로써

그는 다른 사람을 풍족하게 하며,

또한 자기자신의 생명감을 고양시킴으로써

타인의 생명감을 고양시킨다.

 

...'준다'는 것은

어떤 사람을 주는 사람으로 만드는 것을 의미하며,

그들 두 사람이 생에 대하여 감사하게 하는 것이다.

 

...만약 당신이

사랑을 불러일으키지 못한 채 사랑을 한다면,

즉 당신의 사랑이 사랑을 만들어내지 못한다면,

또 사랑하는 사람으로써 삶의 표현으로 당신이 자신을 사랑받는 사람으로 만들지 못한다면,

결국 당신의 사랑은 무능하고 불행한 것이 될 것이다.

 

...준다는 것 이외에도 사랑의 능동적인 성격은

그것이 항상 사랑의 모든 형태에 공통되어 있는

어떤 기본적인 요소들을 의미하는데, 그것들은

'배려, 책임, 존경, 지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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